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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줄탁동기(啐啄同機)의 신앙 (20180318) 등록일 2018.03.17
글쓴이 이영한 조회 41

중국 송대(宋代)의 선종(禪宗)을 대표하는 벽암록(碧巖錄)에 <줄탁동기(啐啄同機)>라는 말이 나옵니다. 계란이 부화하여 병아리로 태어날 때, 이제는 모든 것이 충분히 자라 밖으로 나 갈 때가 되었음을 병아리가 안에서 알을 톡톡 쳐서 어미 닭에게 알리는 것을 <줄(啐)>이라 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때를 놓치지 않고 어미 닭이 밖에서 알을 쪼아 껍질을 깨트려 주는 것이 <탁(啄)>입니다. 바로 이 <줄(啐)>과 <탁(啄)>이 <동기(同機)>-‘한 가지 동(同)’과 ‘때 기(機)’-즉 <줄>과 <탁>이 정확하게 같은 때, 같은 시각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밖에서 쪼아 주는 것이 안에서 두드려 알리는 것보다 빨라도, 그렇다고 해서 늦어서도 안 됩니다. 안팎의 타이밍이 맞아떨어질 때 비로소 튼튼한 병아리가 태어난다는 것이 바로 줄탁동기(啐啄同機)의 문자적 의미입니다. 세상의 이치도 이와 마찬가지여서, 새로운 시대를 일구어 가거나 매사를 처리하는 데에도 적절한 <때(時機)> 적절한 행동이 있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선각자 혹은 선구자 그리고 지도자들의 행동이 이 <때>를 앞지르면 많은 희생이 뒤따르고, 반대로 이 <때>를 놓쳐 버리면 그것은 기필코 민족적 비극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줄탁동기>의 함축적 뜻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결코 닭이나 병아리보다 나을 것이 없음을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하찮은 닭과 병아리의 세계에서는 오늘도 줄탁동기가 어김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반면, 인간세계에서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줄탁동기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각력과 행동력이 동시에 수반되어야만 합니다. 알 속에 있는 병아리는 더 이상 알 속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는 지각력과, 알을 두드려 그 때를 밖으로 알리는 행동력을 동시에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만약 둘 중에 어느 것 하나를 놓쳐도 그것은 정상적으로 부화될 수는 없습니다. 밖에 있는 어미 닭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의 그 무엇도 들을 수 없는, 알속의 새끼가 보내는 신호를 정확하게 포착할 수 있는 지각력과 함께 그 때를 놓치지 않고 알을 쪼아 주는 행동력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한 가지라도 결여된다면 그 어미 닭은 정상적인 새끼를 얻을 수는 없습니다.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기에 헤아릴 수조차 없는, 이 지구상의 모든 닭들이 한결같이 줄탁동기의 결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경이로운 일입니까? 이처럼 정확한 지각력과 행동력이 동시에 수반되어야 하는 줄탁동기의 원칙과 법칙 위에서 태어나고 살아가기에 닭과 병아리의 세계에는 부조리나 불의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왜 인간 세상에는 혼돈과 혼란이 끊어지지 않으며 정의의 이름으로 그릇된 과거가 반복되는 비극이 중단되지 않습니까? 인간은 줄탁동기의 원칙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른 지각력과 행동력이 함께 가지 않을 때 인간의 생각과 삶은 늘 분리될 수밖에 없고 그 당연한 결과로 인간사회는 악순환의 반복에서 벗어날 수가 없게 됩니다.


신앙의 세계 또한 이와 똑같습니다. 지금 우리는 사순절을 지나고 있습니다. 고통과 고난 없이 진리의 지각력과 행동력은 통합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양자의 통합을 위하여 주님께서 고난을 피하지 않으셨을 때 바로 그 십자가를 통하여 주님과 하나님 사이에 <줄탁동기>가 이루어졌으니 부활 곧 영원한 생명이 그 십자가 위에서 부화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부화된 생명 속에서 우리가 이렇듯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줄>에 우리가 <탁>하는 것만이 우리 자신과 이 민족과 나라를 살리는 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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